나라가 망하고 나라를 지키는 원인은 교육에 있다.
'명성황후'를 일본처럼 '민비'로 부르는 대한민국 (1부)
민비는 일제가 낮추어 부르던 호칭. 을미사변이 아닌 을미치욕으로 변경되어야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25548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웅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향후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고 헐뜯으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노부유끼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조선사 편수회
http://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EC%82%AC_%ED%8E%B8%EC%88%98%ED%9A%8C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1830&cid=200000000&categoryId=200003813
[단독] 박정희 사진 추가·‘한국군 베트남인 학살’ 삭제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611417.html
두산동아 수정안 살펴보니
친기업·반노동 관점에 공들이고
북한 부정·친미 서술 강도 높여
저자들 수정안 거부·소송 방침
두산그룹 계열사인 두산동아 출판사가 고교 한국사 교과서 내용을 저자와의 협의도 없이 추가로 수정하겠다고 나선 것은 보수 학계·언론과 재계의 시각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출판사 쪽은 대기업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쪽으로 교과서 내용을 바꿨고, 미국에 불리한 내용은 빼는 대신 북한과 관련해 부정적인 내용을 추가했다.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 당선 위한 것? [2013.09.30 제979호]
[표지이야기] 교학사 교과서, 이승만은 42회 이름 나오고 5장 사진 내며 독립운동사 주역으로 재탄생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한발 더 나아간 ‘식민통치 미화론’
역사학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교과서”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5386.html
<<조선인은 지난 10여년간 사립학교와 서당을 폐쇄하였기 때문에 지금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이때에 학교를 열어 교육시키면 교육내용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배울 것이다. 제국 일본의 주입교육이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들려면,
자기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하여 그들의 민족혼과 문화를 잊어버리게 하고,
선인들의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어 과장하여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부모와 조상들을 경멸케하고, 그 협오심이 병으로까지 발전케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기나라의 사적에 관해 왜곡된 지식을 배워 혐오증에 걸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허무감에 빠질 것이다.
그럴 때 일본의 문화와 일본의 인물과 역사를 소개하면 그 주입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인을 반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
방송통신위원회?, 여성부?, 교육부?, 애니메이션?, AV?, 기무치?, 비빔빠?, 맛코리?, 미소? 낫토?
요즘 초딩들 야동 실태
http://www.onlifezone.com/joy_1/13984309
갈라지고 물새는 학교, 보수는 커녕 예산 다툼만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31214204506573
이승만, 내 국적은 일본" 미국 체류시 자필로 표기
대한제국은 황제가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 대한제국 부정한 이승만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25942§ion=section4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
1904년 결성된 일진회는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을 적극 찬성하는 등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친일단체로 성장했다.
뉴욕헤럴드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과 함께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일본을 주인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일진회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C%A7%84%ED%9A%8C
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과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 유학주, 동학교 이용구 등이 조직한[1]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단체이다. 1904년 8월 18일 한성부에서 송병준이 일본군을 배경으로 '유신회'를 조직하였다가 8월 20일에 다시 '일진회'로 회명을 개칭하고 그 해 9월에 동학의 잔존세력을 조직한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흡수하여 일진회에 통합하였다. 이후 회장 이용구와 송병준 주도하에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하에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일진회는 그 운영의 재정염출문제에 대한 규칙을 보면, '회원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규적인 회비 징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일정한 수입의 재원도 거의 없었다. 처음부터 송병준이 일제의 군사기밀비에 의하여 운영되어왔다. 일진회가 매국적인 행각의 기치를 점차 선명히 내세움에 따라 일본 제국은 이를 이용하고자 5만원을 몰래 지원하여 특별한 보호를 하였고, 러일 전쟁 중 일진회 회원들의 일본군을 위한 수송, 정탐, 노역 등에 대한 일본군으로부터의 총영수고금 8만 9940원, 전쟁 종료 후 통감부로부터 1907년 1월부터 반년간 매월 2000원씩의 기밀보조금, 이해 5월 15일 일본육군성으로부터 10만 원을 각각 교부받았으며, 이해 8월에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보조금으로 26만원을 받았다. 또 송병준이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외무성 장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이토 히로부미가 가쓰라에게 보낸 편지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 일진회가 이토 히로부미와 가쓰라 등 일제 당국자들로부터 이따금 금품을 받아 매국 행위를 감행하고 있었음이 확실했다. 결국 일본군의 특무기관이나 통감부와 교묘히 결부되어 일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일진회의 규칙에는 고문을 두도록 되어 있지 않았으나 일진회의 배후에서 일본인 고문들이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일제 특히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학교폭력 주범 ‘일진회’ 소탕”
경찰, 광주·전남 초·중·고 1천137개교 실태파악 착수
http://www.kjdaily.com/read.php3?aid=1328713200242666s5
일진회 (폭력 단체)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C%A7%84%ED%9A%8C_(%ED%8F%AD%EB%A0%A5_%EB%8B%A8%EC%B2%B4)
일진회(一陣會) 혹은 일진(一陣)은 일본에서 유래한 폭력 단체로 흔히 대부분의 학교 내에 존재하는 폭력 조직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 폭력의 우열로 수순을 정해 놓고 일진(一陣), 이진(二陣)으로 우선 순위를 나타낸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하였고, 한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비슷한 학교 폭력조직 문화가 있다가 1994년경부터 일진이라는 단어가 정착했다.
박정희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0%95%ED%9D%AC
만주군 복무 (1944 ~ 1945)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군관시절 박정희는 스스로 타카기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47]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 또한 高木東熙(たかぎ とおひろ)로 표기되어 있다.[47]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54]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55][56]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 마자 사망했다.[62]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한국군 내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이었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63]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64]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65]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66]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66]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하였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의 지원을 약속하자 미국은 일단 박정권을 향후 10년 이상 지지하겠다고 하여 정권교체 의사를 보류하기도 하였다.[80]
한편 12월 학사고시 제도를 도입하여 12월 22일 학사자격 국가고시를 실시하였고, 196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20]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사재를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20]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 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이라는 주장이 있다.[82] [83]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이때의 밀약 파기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고 평했다. [118] 신용하 교수는 "박 정권이 6,600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독도영유권 포기, 문화재포기, 징용·정신대등의 강제저축금반환포기 등의 국익을 팔아먹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윤보선을 지지하던 장준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광복군의 총부리를 겨누었다"라면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 의혹을 쟁점으로 꺼냈다.[121] 또, 장준하는 "우리나라 청년들을 남베트남에 팔아먹고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라며 베트남 파병을 비판했다.[121]
1968년 1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사상당했다.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968년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으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이 총탄에 순직하였고 시민들도 인명피해를 입었음은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호전성이 드러나고 반공의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던 한 일본인 외교관이 자신의 저서에서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평하였다.[154][155][156]
이의장 "박정희 프락치 총책"
열린우리당 이부영(李富榮) 의장은 20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774
그 뒤에 공산주의자로 변신을 해 군내 프락치의 총책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그러다 김창룡의 방첩대에 잡히니까 자기가 포섭했던 사람을 모두 다 불어 그 사람들을 죽게하고 자기는 살아났다”
매국노 이완용의 유언.jpg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no=11569&table=history
“샌드위치 한국 돌파구? 탈무드 같은 교육에 있죠”
‘탈무드’ 저자 랍비 마빈 토카이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
http://www.shemaiqeq.com/index.php?document_srl=608&mid=info_press&page=4
그는 “중국과 일본 사이 샌드위치 같은 처지인 한국이 돌파구를 찾는 해답은 교육이고, 그 교육의 중심에 탈무드 교육이 있다”고 강조했다.
“탈무드에 ‘마을을 지키는 건 경찰도, 군인도 아닌 선생님’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이 위대한 학생을 만들고 그들이 마을을 지켜나갑니다. 2000년 넘게 유대인들이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전통을 잃지 않고 민족을 꾸려온 것도 바로 교육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