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현실은 겉은 공안국가 속은 공포정치
근거는 선거는 조작?
안정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자는 둘 중 어느것도 얻지 못한다. -벤자민 프랭클린-
공포정치
http://ko.wikipedia.org/wiki/%EA%B3%B5%ED%8F%AC%EC%A0%95%EC%B9%98
공포정치(프랑스어: Terreur, 영어: Reign of Terror)(1793년 9월 5일 - 1794년 7월 27일)는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자코뱅파(산악파)가 실시한 정치 형태를 말한다. 또한 투옥, 고문, 처형 등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 정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테러’의 어원이 되었다.
개요
공포 정치에서 로베스피에르 파는 혁명 반대파, 온건파, 투사 등 반대파의 인물을 차례로 숙청했다. 처형당한 인물은 당통, 에베르, 라부아지에, 카미유 데뮬랭, 뤼실 두플레시(데뮬랭의 아내) 등 수 많은 인사들이 이 기간 처형 당했다. 공포 정치 기간 동안 파리에서만 약 1,400명이나 처형이 이뤄졌다. 프랑스 전체적으로는 약 2만명이 처형되었다. 처형 방법은 총살형도 많았지만, 기요틴 형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레리알 22일 법》 제정에 따라, 사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되었기 때문에 정식 재판 없이 사형을 시켰고, 옥중사도 많아 희생자와 피해자는 약 4만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루소의 저작에서 언급되어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산악파가 상 퀼로트 등 시민에게 지지를 받아 공포 정치 속에서도 인정받았지만, 일반 시민들도 체포 되었고, 또한 비교적 평화기가 찾아오면서 공포 정치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이 정치 형태는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할 때까지 이어졌다.
결과
파리에서 혁명재판소가 설치된 1793년 4월부터 1794년 6월 10일까지 약 1년간 1,251명이 처형되었다 반면 심리를 거치지 않은 약식 재판이 허용된 6월 11일부터 7월 27일 (테르미도르의 반동)까지 불과 47일 사이에 파리의 단두대는 1,376명의 피를 머금었다.
공포 정치에서 반혁명 혐의로 체포 구속된 사람은 50만명,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사람은 약 16,000명이며, 그것 내전 지역에서 재판없이 죽인 사람의 수를 포함하면 약 4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공포 정치는 의심암귀의 악순환을 만들어 냈고, 로베스피에르 파를 고립시켰으며, 테르미도르 쿠데타를 야기한다.
------------------------------------------------------------------------------------------------
의심암귀(의심생암귀)
공안국가